-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퇴근길, 한 남자가 습관처럼 담배 꽁초를 배수구에 휙 버린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발길을 옮겼지만, 그 작은 꽁초는 지금부터 길고 복잡한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의 목적지는? 바로 하수처리장이다.
배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간 꽁초
어둡고 습한 배수관 속. 빗물과 생활하수가 함께 흘러간다.
꽁초는 작은 나뭇가지와 음식물 찌꺼기 사이에서 둥둥 떠다닌다.
여긴 도시의 혈관 같은 통로, 하수관거다.
이곳은 우리가 버린 모든 물과 쓰레기를 모아 거대한 정화의 심장으로 보내는 길이다.
첫 관문 – 스크린 앞에서
잠시 후, 꽁초는 거대한 철창 같은 곳에 도착한다.
이곳의 이름은 스크린. 큰 쓰레기를 걸러내는 1차 필터다.
비닐봉지, 나뭇가지, 페트병 같은 것들은 이곳에서 걸려나간다.
그러나 꽁초는 작고 가볍다. 철창을 스르르 통과해버린다.
난 아직 살아남았어. 꽁초는 그렇게 다음 여정을 향한다.
무거운 자와 가벼운 자 – 침사지
넓은 탱크 같은 공간. 물은 고요해지고, 무거운 모래나 자갈은 바닥에 가라앉는다.
이곳은 침사지다.
꽁초는 가라앉지 않는다. 가볍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물 위에 떠다니며 다시 흘러간다.
하수처리의 두 번째 관문도 무사 통과한 셈이다.
미생물의 도시 – 활성슬러지 탱크
꽁초가 들어선 곳은 마치 도시 한복판 같다.
수많은 미생물들이 활발히 움직이며, 유기물을 먹고 분해하고 있었다.
여긴 활성슬러지 공정이다.
하수 속 유기물을 미생물이 먹고, 깨끗한 물을 만들어내는 핵심 단계다.
하지만 꽁초는?
저건 우리 음식이 아니야. 미생물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담배 필터는 플라스틱 성분으로, 미생물들이 소화할 수 없는 물질이다.
대신 꽁초에서 녹아나오는 니코틴, 카드뮴, 납 같은 독성 물질이 물속으로 흘러든다.
마지막 관문 – 고도처리와 소독
꽁초는 이제 마지막 단계를 향한다.
고도처리라 불리는 곳.
여기서는 질소와 인을 없애고, 자외선이나 오존, 염소 소독을 통해 세균을 죽인다.
하지만 이미 물속에 퍼진 미세 플라스틱 조각과 독성 화학물질은 완벽히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일부는 정화 과정을 거쳤음에도 강이나 바다로 흘러가게 된다.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고, 그 물고기를 먹는 인간의 밥상으로 돌아온다.
처음 배수구에 버려진 작은 꽁초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순간이다.
꽁초 하나의 무게
꽁초 하나쯤이야, 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담배 필터는 자연에서 완전히 분해되는 데 10년 이상이 걸린다.
그동안 흘러나오는 독성 물질은 미세 플라스틱과 함께 강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유럽 환경청은 담배 꽁초를 전 세계 해양 쓰레기 Top 5로 꼽는다.
그 작은 조각이 결국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바닷속 거북이나 고래의 목숨을 위협하는 셈이다.
배수구는 쓰레기통이 아니다
담배를 끄고 무심코 던진 그 순간, 꽁초는 긴 여행을 떠난다.
스크린, 침사지, 활성슬러지 탱크, 고도처리 공정을 거쳐 결국 강으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장치와 미생물이 애써도, 꽁초는 끝까지 살아남아 자연으로 돌아간다.
작은 행동 하나가 도시의 물을, 나아가 지구의 생명을 괴롭힌다.
배수구는 쓰레기통이 아니다.
그곳은 오직 빗물과 생활하수만 흘러야 하는 통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