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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를 떠올리면 보통 이런 장면이 먼저 나온다.
빨간 개집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강아지.
그 옆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는,
항상 어깨가 축 처진 한 소년이 있다.
한국에서 이 만화는 거의 예외 없이 ‘스누피 만화’라고 불린다.
정식 제목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스누피와 그 옆의 노란 새는 모두 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이 만화의 세계는 전혀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스누피 옆에 항상 함께 있는 그 새
스누피 곁을 맴도는 작은 새의 이름은 우드스탁(Woodstock)이다.
이 새는 단 한 번도 사람의 언어로 말한 적이 없다.
대신 삐뚤빼뚤한 기호 같은 소리만 낸다.
그런데도 스누피는 우드스탁의 말을 전부 이해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 관계는 이 만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장치다.
이 세계에서는 완전히 이해받는 존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만화의 세계는 생각보다 잔인하다
겉보기와 달리, 이 만화에는 성공이 거의 없다.
찰리 브라운은 늘 진다.
야구를 해도, 연을 날려도, 미식축구를 해도 결과는 같다.
기대하면 할수록 더 크게 좌절한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불안이 심해 담요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
타인의 인생을 5센트에 단정 짓는 아이,
천재이지만 현실과 단절된 아이,
항상 더럽다는 놀림을 받는 아이.
이 만화의 아이들은 전부 어딘가 고장 나 있다.
그런데 이 세계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
이 무거운 세계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모든 감정을 사람이 아닌 ‘스누피’가 대신 흡수했기 때문이다.
찰리 브라운이 좌절할 때
스누피는 상상 속에서 비행사가 된다.
현실이 실패로 가득할 때
스누피는 개집 위에서 철학자가 된다.
독자는 이 순간, 자연스럽게 스누피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이 만화는 비극이 되지 않는다.
스누피는 주인공이 아니라 ‘완충재’다
중요한 점은 이거다.
스누피는 이 만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찰리 브라운을 성공시키지도 않는다.
세상을 바꾸지도 않는다.
그저 버티는 법을 보여줄 뿐이다.
이 역할을 사람이 아닌 강아지에게 맡겼기 때문에
이 만화는 끝까지 잔인해질 수 있었고,
동시에 끝까지 따뜻할 수 있었다.
이 만화를 만든 사람의 선택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찰스 슐츠다.
그는 50년 가까이 단 하루도 연재를 쉬지 않았고,
죽기 직전까지 직접 그림을 그렸다.
그의 삶은 이 만화처럼 조용했고, 고립돼 있었고,
실패에 민감했다.
그래서 그는 이 세계를 결코 쉽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스누피라는 존재를 만들어
독자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이 만화의 진짜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 만화의 정식 제목은 Peanuts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 만화는 계속 스누피 만화로 불릴 것이다.
그건 오해가 아니다.
이 만화를 끝까지 읽게 만든 얼굴이
스누피였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이 말하고 싶었던 한 가지
이 만화는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실패한 채로 하루를 끝내는 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가장 어려운 역할을
가장 귀여운 캐릭터에게 맡겼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스누피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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