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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정말 별생각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국가 상징 얘기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왔다.
“태국기 말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반 박자 늦게 멈칫했다.
“응?” 하고 되묻자, 친구는 오히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리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태국기 맞지 않아?”
그 말에는 주장도, 우김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라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내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묘하게 어지러워졌다.
분명 나는 평생 태극기라고 알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그 단어가 아주 잠깐 낯설어졌다.
‘태극기… 맞지?’
말로 꺼내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찜찜한 상태.
친구는 여전히 태연했다. 틀렸다는 기색도, 헷갈린다는 표정도 없었다.
그 태연함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나 혼자만 쓸데없이 예민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친구 앞에서 굳이 검색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네이버 검색창에 조용히 글자를 입력했다.
‘태극기’
엔터를 누르기 전, 이상하게도 마음이 살짝 긴장됐다.
“태국기?”라는 말에 웃음이 먼저 나왔던 이유
사실 처음엔 웃었다.
“야, 너 태국 사람이야?”
“국적 바뀌었냐?”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다.
이쯤에서 친구가 “아, 내가 헷갈렸네” 하고 웃어넘길 줄 알았다.
대화는 보통 그렇게 흘러가니까.
그런데 친구는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태국기 맞는 것 같은데?”
그 순간, 웃음이 공중에서 멈췄다.
농담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던 내 얼굴만 어색하게 남았다.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생기는 이상한 공기
사람은 분위기로 대화를 읽는다.
그래서 농담이 농담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말보다 먼저 공기가 이상해진다.
친구는 진지하지도 않았고, 장난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태국기'...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때부터 대화는 미묘하게 어긋난다.
정정하면 유난스러워질 것 같고,
넘기자니 내가 이상해진 느낌.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대신 머릿속에서 같은 단어를 몇 번이나 되뇌고 있었다.
태극기.
태국기.
태… 극… 기.
그래서 우리는 기억 대신 검색을 선택한다
태극기를 몰라서 검색한 건 아니었다.
확인하고 싶었던 건 단어가 아니라,
내 기억, 내 감각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검색창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다시 보기 위해서.
검색 결과는 너무도 당연했다.
태극기.
그제야 머릿속에서 흩어졌던 조각들이
다시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의미가 돌아오고, 단어가 다시 익숙해졌다.
다시 태극기를 떠올리며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다른 걸 알게 됐다.
사람을 흔드는 건 틀린 정보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받아들인 단어들이라는 걸.
우리는 많은 말을 알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저 익숙해졌을 뿐인 경우가 더 많다.
의미를 설명할 수 없고, 유래를 떠올릴 수 없고,
왜 그렇게 불리는지 말로 풀어낼 수 없는 단어들.
그런 단어들은 이런 순간에 힘이 없다.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름을 붙이는 순간,
확신은 쉽게 사라진다.
반대로 공부를 통해 얻은 단어들은 다르다.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맥락을 거쳐 지금의 의미가 되었는지,
그 주변에 어떤 정보의 가지들이 붙어 있는지 알고 있을 때
그 단어는 흔들리지 않는다.
태극기는 여전히 태극기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들과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구분하게 됐다.
우리가 헷갈리지 않는 건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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