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이 글을 쓰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이런 주제로 글을 써도 되나? 너무 무겁지 않나?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게 요즘 내 머릿속을 가장 많이 맴도는 질문이었다. "왜 살아야 하지?" 라는 말이 주변에서 너무 흔하게 들려서, 어느 순간부터 그게 이상한 말이 아니라 그냥 흔한 인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게 좀 무서웠다.
그래서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니체의 허무주의 개념을 다시 들여다봤다. 읽으면 읽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150년 전 사람이 지금 내 주변 풍경을 이미 다 그려놨더라. 이 글은 그 내용을 내 방식으로 정리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좀 얹은 것이다. 정답은 아니다. 그냥, 같이 생각해 보자는 거다.
풍요의 시대에 왜 이렇게 우울한가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신건강 지표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전 세계 항우울제 처방 건수는 매년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고, WHO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여덟 명 중 한 명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 한국은 더 심각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부동의 1위, 40대 이하에서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게 사망 원인 1위다.
왜일까. 흔히 "한국은 교육 경쟁, 취업난 때문이잖아"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조건들을 다 빼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유럽의 복지 선진국 청년들도, 취업 걱정 없는 부잣집 자녀들도 비슷한 공허함을 호소한다. 그러니 특정 국가나 개인의 상황 문제가 아닌,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딱히 힘든 상황이 아닌데도 "지금 죽어도 별로 상관없다"는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그게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냥 삶에서 '다음'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유를 몰랐으니까, 해결도 못 했고.
신이 죽은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니체가 1882년에 쓴 『즐거운 학문』에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단순히 무신론적 선언으로 읽는데, 핵심은 그다음이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여기서 '신'은 단순히 종교적 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삶의 의미, 도덕의 근거,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던 모든 절대적 가치 체계를 뜻한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엔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고통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죽음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까지 다 설명됐다. 삶의 '다음'이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계몽주의, 과학 혁명, 산업화가 이 구조를 무너뜨렸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증명했고,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 존재를 재정의했으며, 이성이 신의 자리를 대체했다. 문제는 이성이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영 시원찮다는 거다. 이성은 "어떻게"는 잘 설명하지만 "왜"는 설명하지 못한다.
신과 전통이 사라진 자리엔 이념이 들어섰다. 공산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이것들은 종교를 배척했지만, 구조적으로는 종교와 똑같았다. 맹목적으로 따를 무언가, 삶을 바칠 대의를 제공했으니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 이념들도 함께 무너졌다. 그 공백을 채운 건 돈과 소비였다. 브랜드가 나의 정체성이 됐고, 더 좋은 직장, 더 큰 집, 더 높은 연봉이 삶의 목적이자 목표가 됐다. 그리고 그 다음이, 지금 세대에게는 없다.
'다음'이 사라진 세대
이게 핵심이다. 예전엔 힘들어도 다음 계단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 열심히 모으면 집 한 채. 이 사다리가 불완전하고 불공평하긴 했지만, 적어도 존재하긴 했다. '다음'이 있으면 지금의 고통도 의미가 생긴다.
지금은 그 사다리의 계단이 무너지거나 너무 멀어졌다. 열심히 일해서 서울에 집을 산다는 건 대부분의 청년에게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다. 2, 3번 계단을 밟더라도 5, 6번에 닿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그러니 "그냥 3쯤에서 그만하자"가 된다. 다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돈을 모으지 않고 버는 대로 쓰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도덕적으로 낭비다, 미래를 생각해라는 식의 비판이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본다. 그건 어쩌면 다음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살기 위해 찾은 방식이다.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나름의 합리다.
마지막 인간과 초인 사이에서
니체는 허무의 시대에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뉠 거라고 했다. 하나는 '마지막 인간', 다른 하나는 '초인'이다.
마지막 인간은 허무를 알면서도 그냥 안주하는 사람이다. 쾌락과 안락만을 좇고, 위험을 피하며, 작은 만족으로 버텨낸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삶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현실에 기대는 것이다. 끝내 삶은 무의미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인은 반대다. 기존 가치가 허구임을 알고도 쓰러지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다. 니체 본인도 이게 소수의 이상임을 인정했다.
나는 여기서 조금 다른 독해를 한다. 초인이 될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건 '나만의 다음'이 있느냐 없느냐다. 니체가 말한 '힘의 의지'는 거창한 야망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씩 극복하려는 의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려는 욕구다. 유행에 끌려다니며 사는 대신 좋아하는 취미에 몰두하는 것, 남의 시선에 맞춘 목표 대신 나에게 의미 있는 작은 목표를 세우는 것. 이게 다 힘의 의지가 발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걸 하려면 먼저 사회가 '절대적 가치'처럼 세팅해 놓은 것들을 의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명문대, 대기업, 아파트, 평균 이상의 연봉. 이게 진짜 나의 '다음'인지, 아니면 그냥 사회가 갈아 끼운 새로운 이념인지 물어봐야 한다.
이 지점에서 허무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거기 주저앉지도 않는 태도가 중요한데 — 이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낸 개념이 있다. 궁금하다면 이전에 썼던 낙관적 허무주의 포스팅(https://jcmomentum.blogspot.com/2025/09/blog-post_24.html)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마무리: 자신만의 다음을 만드는 일
글을 마무리하면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이게 완전히 해결된 사람이 아니다. 그냥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조금 덜 허무하게 살 수 있겠다 싶어서 쓴 거다.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생각해 보자는 거다.
SNS에서 보이는 남의 꾸며진 삶에 기준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평균 연봉보다 좀 낮다고 실패한 삶이 아니고, 아파트를 못 샀다고 무의미한 삶이 아니다. 절대적인 가치라는 건 사실 없다. 그러니 내가 직접 가치를 정하고, 나만의 다음을 만들어 가면 된다.
주변에서 열정 넘치고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그냥 어쩌다 자신만의 다음을 찾아서 살고 있는 거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하루, 어제의 나보다 조금만 더 나은 무언가. 그걸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허무주의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의 '다음'은 무엇인가요? 사회가 만들어 놓은 다음 말고, 진짜 나의 다음이요.
다음 실패는 더 나은 실패가 되길 바라면서, 아니 노력하면서.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