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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재미없다는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릴 것 같았고, 그렇다고 괴롭다는 말을 쓰기엔 딱히 그 정도도 아니었다. 우울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닌 그 묘한 상태. 40살을 갓 넘기면서 그게 내 일상이 됐다.
좋아하던 것들이 하나씩 시들해졌다. 주말에 나가던 드라이브가 귀찮아졌고, 즐겨 보던 드라마가 지루해졌고, 오랜 친구를 만나도 예전만큼 신나지 않았다. 처음엔 피곤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많아서, 잠을 못 자서, 몸이 지쳐서. 그런데 쉬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건가. 다들 이렇게 사는 건데 나만 유독 재미가 없는 건가. 그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익숙해진다는 것의 함정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처음 차를 샀을 때 그 설렘이 한 달을 못 갔다. 이사한 집이 처음엔 그렇게 좋더니 석 달 만에 그냥 집이 됐다. 처음 먹었을 때 감동적이었던 음식이 두 번째엔 그냥 맛있는 음식이 됐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처음엔 감동이다. 근데 반복되면 당연해진다. 당연해지면 더 이상 기쁘지 않다. 이게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심리학에선 이걸 쾌락 적응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든 적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에어컨을 처음 켰을 때는 시원하다. 30분 지나면 그냥 평범한 온도가 된다. 행복도 비슷하다. 처음엔 감동이었던 것이 반복되면 배경이 되고, 배경이 되면 보이지 않는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결혼 초에는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따뜻했다. 20년이 지나면 그게 공기처럼 당연해진다. 배우자가 나빠진 게 아니고 내 감정이 식은 것도 아니다. 그냥 적응한 것이다.
오래된 친구도 그렇다. 처음 친해졌을 때는 만나는 것만으로 신났다. 지금은 만나도 또 그 이야기다. 친구가 재미없어진 게 아니라 내가 그 관계에 익숙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 적응이 40대가 되면 더 광범위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20년, 30년 동안 쌓인 경험들이 있다 보니 뇌가 웬만한 것엔 이미 익숙하다. 새로운 자극이 와도 예전만큼 반응하지 않는다.
설레지 않는 이유
한 가지 더 있다.
젊었을 때는 맛집을 예약하는 그 순간부터 설랬다. 여행 계획을 짜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실제 경험만큼이나 짜릿했다.
지금은 그 기대감이 많이 사라졌다. 맛집을 예약해도 담담하고, 여행을 계획해도 예전 같은 두근거림이 없다.
이것도 뇌의 문제다.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흔히 쾌감 물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기대와 동기의 물질이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을 때 분비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 메뉴판을 볼 때 더 설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 도파민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변한다. 뇌에서 도파민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줄어든다. 그 결과 같은 경험을 해도 예전만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좋아하던 노래를 들어도 소름이 돋지 않는 것, 손주를 봐도 첫째 때만큼 벅차지 않은 것, 오랜만에 좋은 식당에 가도 감동이 덜한 것. 이 모든 게 내가 무뎌진 게 아니라 뇌의 반응 방식이 바뀐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된 게 아니었다. 뇌가 수십 년의 경험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였다.
재미없다는 감각의 정체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40살을 넘기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의미가 있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질문들이 처음엔 낯설었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 몰랐다. 그냥 나이 탓인가, 나만 이런 건가 싶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삶을 여러 단계로 나눴는데, 중년 이후에는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며 의미를 찾으려는 과정이 시작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좋은 영화였다고 느끼면 마음이 편안하다. 시간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면 찜찜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그 묘한 무감각은 어쩌면 내 삶 전체를 다시 정리하려는 내면의 작업이 시작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겉으로는 재미없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해봤다
뭔가 크게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 자체가 이미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니까, 오히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매일 다니던 길을 한 블록 돌아서 걸어봤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뇌가 뭔가 다르다고 느끼기엔 충분했다. 처음 가보는 카페에 들어가봤다. 익숙한 것들 사이에 낯선 것 하나를 끼워 넣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전에 내일 할 즐거운 일 하나를 정해두는 것. 내일은 시장에 가서 제철 과일을 사와야지. 내일은 오래 못 간 공원에 가봐야지. 이 작은 계획 하나가 아침에 눈을 뜨는 힘이 됐다.
그리고 의외로 도움이 된 것이 있다. 내 인생에서 잘한 것 하나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거창한 성취가 아니어도 된다. 오늘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것, 힘든 시기를 버텨낸 것, 뭔가를 끝까지 해낸 것. 이것이 에릭슨이 말한 자기 통합의 시작이다. 내 삶이 의미 없었다는 절망 대신, 그래도 잘 살았다는 인식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것이다.
재미없는 게 당신 탓이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40대 이후에 느끼는 그 무감각함은 당신이 무뎌진 게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경험에 뇌가 적응했고, 도파민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변했고, 삶을 다시 정리하려는 내면의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당신이 잘못 살아온 게 아니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일을 위해, 관계를 위해 달려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볼 틈이 없었을 것이다. 마음에 굳은살이 생긴 것은 약해진 증거가 아니라 버텨온 증거다.
겨울 나무가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는 살아있다. 지금 느끼는 무감각함도 그렇다. 잠시 겨울인 것이다.
작은 것 하나를 다르게 해보는 것. 그게 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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