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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20대엔 바빴고, 30대엔 더 바빴다. 책을 사도 책장에 꽂아두고 끝인 경우가 많았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1년이 지나있었다. 그게 반복됐다.
그런데 40대가 되면서 뭔가 달라졌다. 책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달라진 것이겠지만.
남은 시간을 계산하게 된다는 것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이나 될까.
일주일에 한 권을 읽는다고 가정해도,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 주가 몇 주나 될까. 바쁜 주도 있고, 아픈 날도 있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도 있다. 욕심을 빼고 계산해보면 1년에 많아야 스물다섯 권, 적으면 열 권 안팎이다.
40대 초반에서 70대까지 잡아도 3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면 많이 잡아도 700권 남짓이다. 서점에 가면 벽 하나가 통으로 책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 중에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고작 몇백 권이다.
숫자로 보니까 갑자기 현실이 됐다.
그때부터 책을 고르는 기준이 바뀌었다. 예전엔 유행이니까, 베스트셀러니까, 누가 좋다고 하니까 골랐다. 지금은 앞부분을 몇 쪽 읽어서 뭔가 당기지 않으면 그냥 내려놓는다. 시간이 아까워서다. 이 책이 나의 남은 700권 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가를 따지게 됐다.
같은 책을 다시 읽으면 달라진다는 것
10대 때 읽은 책을 40대에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책이 된다.
학교에서 숙제로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해보자. 그때는 그냥 황당한 이야기였다. 사람이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는 설정이 어이없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물어보는 주제 파악이 귀찮았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에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힌다.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한 그레고르 잠자. 결혼도 안 하고, 부모님을 먹여 살리고, 여동생이 하고 싶은 건 다 해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외모가 바뀌자 가족은 그를 짐짝 취급한다. 마지막엔 그 여동생이 "저거 갖다 버려"라고 한다.
40대에 이걸 읽으면 그레고르가 낯설지 않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왔는데 어느 순간 내가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가 40대다. 내가 인식하는 나와 세상이 보는 나 사이에 간극이 생기기 시작하는 시점.
그래서 어떤 책들은 10년에 한 번씩 읽어야 한다. 읽을 때마다 내가 달라져 있어서, 책이 달라진다.
인생은 안내서 없이 시작하는 여행이다
서점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은 식당 하나를 가도 리뷰를 열 개는 읽는다. 별점 확인하고, 메뉴 사진 보고, 주차 가능한지 확인하고 간다. 해외여행을 가면 몇 주 전부터 여행지를 조사한다. 어디서 자고, 어디서 먹고,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다 미리 준비한다.
그런데 인생은 아무 안내서 없이 시작했다.
태어날 때 아무도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살면 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학교는 시험 잘 보는 법을 가르쳐줬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책이 필요하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겪은 것, 생각한 것, 실패한 것, 깨달은 것이 담겨 있으니까. 고전이 수백 년을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인간이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이 겪는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의 해상도는 생각보다 낮다
이런 말이 인상 깊었다. 언어의 해상도는 생각의 해상도보다 훨씬 낮다고.
나는 빨간 사과를 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는 빨강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빨강은 정확히 같지 않다. 완전히 같은 색이 아니라 붉은 기도 있고, 초록 기도 있고, 노란 기도 있는 복잡한 색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빨간 사과라는 단어 하나로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같은 단어를 쓴다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노력이라는 단어, 성공이라는 단어. 같은 단어를 써도 각자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르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배신처럼 느껴지는 일이 생기고, 갈등이 생긴다.
40대가 되면서 이게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다른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알면 상처받는 횟수가 줄어든다. 완전히 없어지진 않지만.
뇌과학자가 말하는 잡생각의 의미
사람의 뇌는 동시에 수백만 가지를 처리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오늘 저녁 뭐 먹을지, 아까 했던 말이 실수였나, 내일 있는 미팅이 걱정된다는 생각이 같이 돌아가고 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방 말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도 다른 생각들이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온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그걸 그대로 글로 썼다. 한 사람의 하루 동안 생각들을 억제하지 않고 다 꺼내놓은 것이다. 그래서 읽기가 어렵다. 앞 문장과 다음 문장이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겉으로는 정리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속에선 수백 가지 생각이 동시에 흘러가고 있다. 그 혼잡함이 비정상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 상태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는 것
요즘 다시 읽고 싶은 책이 몇 권 생겼다.
20대에 읽었는데 그냥 스쳐지나간 것들이다. 그때는 이해가 안 됐거나, 재미가 없었거나, 학교 숙제로 읽어서 반감이 있었던 것들이다. 지금 다시 읽으면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도 그중 하나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굳이 올라가다 얼어 죽은 레오파드 이야기. 20대에 읽었을 때는 그냥 이상한 이야기였다. 40대에 읽으면 뭔가 다를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올라가는 이유. 그게 지금의 나한테는 다르게 읽힐 것 같아서다.
결국 책은 나를 대입해서 읽는 것이다
서점에서 나이 든 할머니가 손주 줄 그림책을 고르고 있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아이한테.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책은 결국 나를 대입해서 읽는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나'이고, 율리시즈의 레오폴드가 '나'이고, 킬리만자로의 레오파드가 '나'다.
어떤 나이에 읽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져 있으니 같은 책이 다르게 읽힌다.
그래서 좋은 책은 한 번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같은 책이 더 풍부해진다. 내가 더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40대가 되면 가속도가 붙는다고들 한다. 시간이 더 빨리 간다고. 그래서 더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그리고 좋은 책은 한 번만 읽기에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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