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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그늘을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의 작은 섬 소록도를 기억합니다. 한센병(옛날 말로 나병) 환자들이 강제로 격리되던 섬.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고, 사람의 존엄은 질병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져 버렸습니다. 그 섬의 기억은 지금도 우리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영국에서 온 한 신부님의 이름이 겹쳐집니다. 바로 천갈로, 본명 로저 테넌트 신부입니다.
소록도의 질문, 인간의 존엄을 묻다
소록도는 단순히 격리의 섬이 아니었습니다. 병과 함께 살며 존엄을 지키려 했던 환자들, 그 곁에서 함께 울고 웃은 이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사회의 벽에 가로막힌 이들을 어떻게 품어낼 것인가. 그 질문은 소록도에서 시작되었고, 훗날 마석이라는 땅에서 하나의 답으로 이어졌습니다.
왜 소록도로 격리되었을까
한센병(나병)은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피부가 변하고 감각이 무뎌지는 증상 때문에 외형적 차별이 컸고, 과학적 치료법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전염병으로 오해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는 사회적 불안을 잠재운다는 이유로 환자들을 한곳에 모아 강제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1916년에 설치된 소록도 자혜의원, 지금의 국립 소록도병원입니다.
당시 환자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잡혀왔고, 가족과는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섬을 빠져나가려다 붙잡히면 가혹한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병보다 더 무서운 건 차별과 낙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도 환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소록도의 역사는 단순히 의료의 역사가 아니라, 사회가 소수자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집단적 기억입니다. 바로 그 기억 위에서 천갈로 신부가 걸었던 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국 청년, 한국 땅을 선택하다
천갈로 신부는 1919년 호주 타스매니아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1954년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전쟁 직후라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는 편안한 교구 사목이 아닌, 가장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이름까지 바꾸어, 스스로를 천갈로라고 불렀습니다.
마석 성생원의 시작
1960년, 그는 남양주 화도읍 마석 일대에 땅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소록도를 떠나왔지만 여전히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음성 한센병(나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생원이라 불린 이 공동체는 4만 평의 땅 위에 12동의 집과 25세대의 삶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학교와 성당도 지어졌고, 닭을 키우고 밭을 일구며 자립을 모색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환자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함께 울고 웃은 마석의 세월
마석은 시간이 흐르며 변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가구 공단이 들어서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아오면서 이곳은 다양한 삶이 섞이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성생원 사람들은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냈고, 천 신부는 그 곁을 늘 지켰습니다. 그에게 신부라는 직함보다 더 어울린 이름은 아버지, 친구였습니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이어진 인연
천 신부는 이후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사를 연구해 영어로 한국사 책을 펴냈고, 소록도의 현실을 모티프로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종교인으로서의 활동을 넘어,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안의 사람들을 끝내 품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2003년, 그는 영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고향 땅에서 눈을 감았지만, 한국에서의 10여 년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마석이라는 공간을 통해 한국 사회의 한 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천갈로 신부는 유명인도, 역사책의 첫머리에 오를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이들과 함께하며, 그 곁에 집과 마을을 지어 주었던 그의 삶은 지금도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소록도의 기억과 마석 성생원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병을 이유로, 출신을 이유로, 혹은 다른 모습 때문에 누군가가 배제될 때 우리는 어디에 설 것인가.
천 신부가 남긴 답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작은 선택들이 한 공동체의 희망을 지켜냈습니다.
맺으며
소록도의 그늘에서 시작된 질문은 남양주 마석 성생원에서 한 갈래의 답으로 이어졌습니다. 천갈로 신부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가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은, 잊힌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또한 누군가의 곁에서 조용히 손을 잡아 줄 수 있기를,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속삭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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